본문 바로가기

쓰다 萬 詩, 多 쓴 詩

[김남주] 길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억압의 사슬에서 민중이 풀려나는 길이고

외적의 압박에서 만족이 해방되는 길이고

로동자와 농민이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나는 알고 있다 이 길의 처음과 끝을

이 길의 력사와 그 내력을 나는 알고 있다

처음에 해방군으로 가장한 미군의 점령이 있었다 그것은

평화의 가면이었고 자유의 솜사탕이었고 제국주의의 숨은 발톱이었다

마침내 그들 점령군들은 잘룩한 내 조국의 허리를 두 동강내고

그 아랫부분을 제 손아귀에 넣었다 그리고 그들은

넝마주이가 쓰레기를 긁어 모으듯 그렇게 인간쓰레기를 긁어모아

구식민지의 관료들, 친일매판자본가와 지주들, 식민지군대의 장교들,

애국투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투옥하고 학살하기를 밥 먹듯이 했던

특고 형사들, 헌병 보조원들, 주재소 순사들 밀정들을 긁어모아

38선 이남에 소위 자유민주주의정부를 세웠다

그리하여 그 동안 40년 동안 양키제국주의자들

야바위꾼의 손놀림으로 꼭두각시정권을 바꿔치기 하면서

리가를 박가로 바꿔치기 하고 박가를 전가로 바꿔치기 하면서

떡 주무르듯 내 조국의 아랫도리를 주물러 왔다

그리고 그들 야바위꾼들은 자유민주주의 바로 그 이름으로

내 조국의 자유의 깃발과 민주주의를 훔쳐갔을 뿐만 아니라

원조와 경제협력이란 탈바가지를 쓰고 그 동안 40년 동안

우리 로동자 농민의 피와 땀과 눈물을 략탈해 갔을 뿐만 아니라

농약과 화학비료와 공해산업으로 내 조국의 대기와 토지를 더렵혔다

 

뿐이랴, 그들 신식민주의자들은 시카고의 깽영화

텍사스의 카우보이식 땐스를 동원하여 내 조국의 춤과 노래를

질식시키고 병신다리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강 건너 마을의 순결한 처녀지를 집단으로 릉욕했을 뿐만 아니라

끝내는 겨레의 골수까지 반공의식으로 파먹어

우리의 팔과 다리를 마비시키고 민족의 동질성까지 남남으로 갈라놓았다

 

나는 알고 있다 또한 이 길의 어제와 오늘을

이 길을 걷다가 쓰러진 다리와 부러진 팔과 교살당한 모가지를

고문으로 구부러진 손가락과 비수에 찔린 등과 뜬 눈의 죽음을

그들은 지금 공비와 폭도와 역적의 루명을 쓰고 릉지처참으로 쓰려져 있다

아무도 그들을 일으켜 세워 자유와 조국의 이름으로 노래하지 못한다

해와 달과 조국의 별이 밝혀야 한다 밤이 울고 있다

나는 또한 알고 있다 내가 걷는 이 길의 오늘과 내일을

이 길 어디메쯤 가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온 허위가 있고

마침내 우리가 찢어야 할 가면이 있고 성조기가 있다

자유의 길 이 길을 어디메쯤 가다보면 거기 틀림없이

압제자가 길들여 놓은 사나운 경찰견이 있고

마침내 우리가 뽑아야 할 억압의 뿌리 이빨이 있고

해방의 길 이 길을 어디메쯤 가다보면 거기 자본가와

점령군에 고용된 용병의 무리가 있고

마침내 우리가 무찔러야 할 총 칼의 숲이 있다

그렇다 자유와 해방과 통일의 길 이 길을 가면 거기 틀림없이

압제와 자본의 턱을 보아가며 재판놀음을 하는 검사와 판사가 있고

마침내 우리가 벗겨야 할 정의의 가면이 있고 불의가 있고

인간성의 공동묘지 감옥의 밤이 있고 마침내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증오의 벽이 있다

 

그러니 가자 우리 이 길을

길은 가야 하고 언젠가는 력사와 더불어 이르러야 할 길

아니 가고 우리 어쩌랴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어깨동무하고 가자

침묵의 시위를 떠나 피로 씌어진 언어의 화살로 가자

제 땅 남의 것으로 빼앗겨 죽창 들고 나섰던 옛 농부의 들녘으로 가자

제 나라 남의 것으로 빼앗겨 화승총 메고 나섰던 옛 전사의 산맥으로 가자

부러진 팔 로동의 새벽을 여는 망치소리와 함께

수유리의 돌 사이에서 아우성치는 사월의 넋과 함께

파괴된 오월의 도시 학살당한 금남로의 피묻은 항쟁으로 가자

북을 쳐라 둥둥둥 전투의 개시를 알리는 골짜기의 긴 쇠나팔소리와 함께

가로 질러 들판 싸움을 재촉하는 한낮의 징소리와 함께

발을 굴러 땅을 치며 강 건너 불빛으로 가자

가고 또 가면 이르지 못할 길은 없나니 이제 우리

제 아니 가고 길만 멀다 하지 말자

가고 또 가면 이르지 못할 길은 없나니 우리 이제

제 아니 가고 길만 험타 하지 말자

눌려 학대받고 주려 천대받은 자 모든 것의 주인되는 길

자유의 길 해방과 통일의 길이여

 

("길" 「조국은 하나다」, 도서출판 南風, 1988, 135-137쪽)
(두음'법칙'을 '법칙'으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로동(勞動)/로동자(勞動者), 력사(歷史), 략탈(掠奪), 릉욕(凌辱), 루명(陋名), 릉지처참(陵遲處斬)으로 바꾸어 옮겼다.)

------------------------------------------

 

김남주 시인이 15년형을 선고받아 1979년부터 1988년 12월까지 9년 하고도 세 달 동안 갇혀있던 감옥, 그 마지막 해인 1988년 감옥에서 나오기 전 발행된 시집 「조국은 하나다」에 실린  이 시 역시, 절절한 싸움의 고백이고 다짐이자 싸움 그 자체이다. 

 

시인 자신이 수감되기 전부터 걸어온 길, 다시 9년간 감옥 속에서 싸워온 길이, 바로 로동자(勞動者) 인민(人民)이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민족이 외세(外勢)에서 풀려나는 길임을 깨달은, 그 믿음을 1연에서 밝히고 있다.

 

2연에서 미제(米帝) 점령군(占領軍), 양키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 신식민주주의자(新植民主義者)들이 눈귀속임 껍데기 '독립'을 던져주고 사실상 지배하기 위해 세운 꼭두각시 '정부', 즉 '대한민국'이라는 간판의 신식민지(新植民地), 인간쓰레기들을 긁어모아 세운 '자유민주주의정부'가 들어선 경위(經緯)를 그리고 있다.

 

3연 "끝내는 겨레의 골수까지 반공의식으로 파먹어"란 부분은 이 순간까지 유효하기에, 적이 가슴 서늘하고도 뼈아픈 지적(指摘)이 아닐 수 없다.  

 

4연을 보면, 우리가 걸어온 길에, 앞으로 더 가야할 길에 무엇이 놓여져 있는지 사실적으로 밝히고 있다. 

정의(正義)인 양 가장(假裝)한 불의(不義)의 가면(假面)이 있고, 찢어야 할 성조기(星條旗)가 있으며,

사냥개의 이빨이 있고, 占領軍이 부리는 용병(傭兵)이 있으며,

저들 양키 점령군 제국주의자들과 자본(資本)이 이러저리 턱으로 부리는 '정권', 국개, 판새, 검새, 의새 등의 무리가 있다.  

 

그 길 어디메쯤 가면 맞닥뜨리게 되는, 우리가 찢어야 할 그 假面은, 

바로 양키 占領軍, 신식민주의자들이 남녘땅 이 곳 下手人들을 시켜 내리먹인 가짜 '자유', 가짜 '민주주의', 이 둘을 합친 '자유민주주의', 그것을 내걸어 참칭한 이름인 '대한민국' '정부'다. 

 

우리 살아온 곳이 우리 살고 있는 곳이 여전히,

인간성의 공동묘지, 감옥의 밤인데,

밤이 울고 있는데,

해와 달과 별이 밝혀주겠거니 

바라고만 있을 것인가?

해와 달과 별이 밝혀줄테니 '나는 아무 일 안 해도 된다'고 말하겠는가?

 

마지막 5연까지 읽고나면,

제 땅 남의 것으로 빼앗겨 죽창 들고 나섰던 농부의 들녘에서,
제 나라 남의 것으로 빼앗겨 화승총 메고 나섰던 전사의 산맥에서,
수유리 무덤 돌 사이에서, 피묻은 행쟁 금남로에서 벌여온 싸움,

아직 끝나지 않은 이 항쟁(抗爭)이,

그저 이야기, 그 무슨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꿈보다 기막힌 현실임을,
꿈보다 더 꿈같은 현실 속 싸움임을
저릿하게 
깨닫게 된다.

 

허나, 시인은
"아니 가고 우리 어쩌랴"고 말한다.
"길은 가야 하고 언젠가는 력사와 더불어 이르러야 할 길"이다.
그 "언젠가"는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부터 이어지는 가까운 장래의 날들일지니
"제 아니 가고 길만 멀다 하지 말자"

"제 아니 가고 길만 험타 하지 말자" 한다.

 

1945년 9월 미군 점령군 놈들이 이곳 남녘땅에 발디딘 후로 지금 이순간까지 79년간 줄곧 지껄여져온 '자유'란,

그 양키 점령세력과 그 하수인, 매판자본가들만이 누리는 가짜 '자유',

대다수 인민을 속이고 등쳐먹고 쳐죽여 누리는 악귀(惡鬼)들의 '자유'일 뿐이다.

그러니 1945년 8월 '광복'도 광복이 아니었고 '해방'도 해방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이 살아나자면,
남녘땅 우리 모두 사람답게 사람으로 살자면,
참 자유, 참으로 풀려나는 길로 나서 끝까지 걸어내야 한다.
끊어진 南과 北이 하나 되어야 한다.
우리는 北과 하나 되어야 한다.


참 자유, 참 해방으로 나아가는 길은

곧 北과 南이 하나되는 통일(統一)의 길이다.

 

 

 

 

 

 

'쓰다 萬 詩, 多 쓴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남주] 오늘은 그날이다 1  (0) 2024.10.30
그 분  (0) 2024.10.14
상전(上典)도 하수인(下手人)도  (0) 2024.10.09
그 불  (0) 2024.10.08
지금은 戰爭中_3  (0) 2024.10.04